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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밋서울 이후 일련의 사건에 대한 C의 의견2: 대결이 아닌 해결을 위한 모색과 제안


이 글에서 저는 가능한 “해결”을 모색하기 위해


  • 먼저, 현재 고착된 것처럼 보이는 대결 구도에서 빠져나와 해결을 향하기 위해 “대안적인" 법정적 사고와 문제 접근 방식을 제안하고, 서울 노리밋에서 일어난 문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간략하게 검토한 후 


  • 페미니즘적인 지평에서 해결을 향해 움직이는 동력을 찾기 위한 제안을 하겠습니다.




1. 들어가며


<대책위 입장>에는 이러한 구절이 나옵니다:

 

“당시 상황을 ‘매우 잘 해결된 사례’나 ‘문제제기자들과 충분히 의사소통을 하여 진행한 행사’라고 설명하는 부당한 주장이 반복되는 것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합니다.”

 

이러한 주장을 누가하나요? 적어도 저나 D 씨를 비롯해 제 지인들은 그러한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매우 잘 해결된…”라는 표현은, 그게 어떤 문제에 대한 것일지라도 상당히 안일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그런 말을 쓰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습니다. 인용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 있었던 발언이라면 누가 어떤 맥락에서 쓴 말인지 알고 싶습니다. 


확실한 것은 양측이 모두 “해결"을 원하지만 그것을 향하는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들이 해결이 아닌 서로에 대한 대결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해결을 위해서는 현재처럼 서로를 향해 대립해 있는 방향성이 조금 바뀌어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미 상처받고 단절된 관계입니다만, 적어도 현재의 파괴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가능한 수준의 해결을 도모하기 위해 저는 여기서 (개인적으로 몇 년전부터 조금씩 읽어왔던) “다른” 법정/정의의 개념들에 대해 생각해보려합니다. 


2. “대결”이 아닌 “해결”을 위한 다른 정의, 법정적 사고, 문제 접근 방식


해결을 위해선, 아무것도 확인하지 않은 채 타자의 의도를 상상한 후 비난하는 진실공방을 멈추고,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한 후 그 위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색해야 합니다. 


(1) 운동진영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제안된 회복적정의/ 콜아웃-콜인


혹시 회복적 정의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는 징벌을 통해 정의를 세우는 통상적인 정의의 개념인 응보적 정의(retributive justice)와 다른 정의의 개념인데요. 


변혁적 정의(transformative justice)라는 개념과 함께 북미 운동권에서 적극적으로 논의되었습니다[1]. 우리들이 현재 겪고 있는 것과 같은 운동 사회의 문제, 즉 운동진영 내에서 차별적인 행동이나 발언을 멈추려는 노력과 시행착오 속에서 주목을 받게된 생각방식입니다 [2]. 


또하나, 역시 4-5년전부터 북미사회운동에서 화두가 된 것으로, 콜아웃 문화(call-out culture)에 대한 논의가 있습니다. 운동씬 내부에서 적절치 못한 말이나 행동이 벌어졌을 때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라는 것이 논의의 핵심인데요. 문제적인 행동이나 말을 한 사람(들)을 언어적 직접행동의 방식으로 고발하는 콜아웃(call out)이, 고발을 실행하는 사람이 언어적인 퍼포먼스를 하는 방식으로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고 개인화되는 경향,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잘못한 사람에게 낙인을 찍고 공동체 밖으로 추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 그러한 조치가 사실상 영구적인 방식이 되는 것에 대한 고민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콜인(call in)이라는 말/실천이 제안되는데요. 콜아웃이 공공연한 항의/고발의 행위를 수행함으로서 문제인물을 징벌하는 응보적 정의의 면모를 보이는 반면, 콜인은 문제인물과 접촉하고, 문제를 성찰/반성하는 과정을 통해 행동의 개선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회복적/변혁적 정의를 도모하는 개념/실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콜인(혹은 회복적/변혁적 정의 방식)이 무조건 긍정적이고 콜아웃(혹은 응보적 정의)은 부정적인 것이라는 식의 가치판단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방식을 통해 해결을 도모할 것인가는 맥락과 상황에 따라 신중하게 결정되어야만 합니다 [3].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노리밋 준비과정에서 벌어진 문제발언, 그에 대한 문제제기,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이 (문서등에 의한 판단입니다만) 그 일련의 과정이 콜아웃/콜인에 대한 논의와 여러모로 닮아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 노리밋사태를 둘러싸고 벌어진 두가지 콜아웃


우선 최초의 그룹을 채팅방 (주로 도쿄의 운동 네트워크)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안에서 문제제기가 일어나고, 그룹 안의 누군가가 콜아웃을 합니다 (1차 콜아웃). 


북미 사회에서 일어난다는 통상적인 콜아웃의 전형적인 흐름과 다른 것은 문제제기자들이 문제제기후 바로 그룹을 떠났고, 콜아웃을 당한 사람은 그룹에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코엔지 그룹의 권력이 남성중심적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현 <대책위>는 그렇게 분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코엔지 그룹(그 외연을 포함한 도쿄 사무국) 내에는 문제제기자들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들은 콜인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싶어했다는 해석입니다. 


이때 콜인의 힘이 문제 발언자 뿐만 아니라 문제제기자들에게도 향했고, 그 힘은 함께 젠더토크를 하자는 제안, 즉 콜인을 포함한 행사 기획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문제제기자들은 '말투가 무섭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말투에 대한 지적에 대해선 이후에 “톤폴리싱”에 대한 부분에서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그런 상반된 멧시지를 그룹에서 (물론 젠더토크를 하자고 한 사라들과 말이 무섭다고 한 사람들은 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받으면서 문제제기자들은 일종의 압박 혹은 상처를 받은 것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문제제기자들이 나가게 되었고, 이 일련의 과정에서 현 <대책위> 측은 문제제기자들이 낙인이 찍힌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를 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 후 한국어/일본어로 된 두 편의 에버노트 비판문 (2차 콜아웃)은 실제로 이러한 의견을 개진하고 있습니다. 


2차 콜아웃 (그중에서도 특히 비판문2)은 최초의 문제 발언자를 향한 콜아웃이라기보다, 1차 콜아웃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채팅방에 남아 계속해서 노리밋 준비에 참여하거나 젠더토크 등을 진행한 사람들을 문제화하는 콜아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콜아웃을 제기한 단위는 도쿄와 서울을 넘나드는 운동 씬으로 확장되었습니다. (분명히 발화된 적은 없지만 노리밋 서울과 참가자들에 대한 보이콧을 요구하는 콜아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코엔지와 빈마을> 행사를 진행한 저나 D씨와 문제제기자들의 관계가 끊어지고, 1년반 후 상영회에서 D씨의 참가는 제한되었습니다. 이번 7월에 나타난 <대책위의 입장>은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문서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2차 콜아웃을 통해 콜아웃의 대상과 범위가 확장되는 와중에 함께 확장되어 적용된 “2차가해”라는 단어에 대해 조금 더 신중히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3) 2차 콜아웃에서 지목된 2차가해, 혹은 가해에 대한 점검


저는 2017년 8월 B 씨와 이 부분에 대해 채팅으로 이야기를 나눈 바 있습니다. 그 대화는 제가 B 씨가 언급한 “2차가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서 시작됩니다. 


2차 가해란 통상적으로 성폭력/성희롱 등의 가해가 1차적으로 발생한 후에 그것을 주변 사람들이 의심하거나 확인 절차가 피해자에게 고통을 주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러나 B 씨가 말하는 2차 가해는 원사건 (채팅방에서의 “아시아 호스트 클럽, 아시아 걸즈 바” 발언과 그에 대한 1차 콜아웃)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판단하고 대응하고 있는가의 문제였습니다. 


제가 그것을 2차가해라고 할 수 있는건지 물어보자 B 씨는 "1차 가해라는 게 애매”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2차가해라고 부르고 있지만” 실상은 “그냥 가해”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합니다 (참고로 8월17일의 대화입니다). 


여기서 일련의 사건에 대해 적용된 “2차가해”, 혹은 “그냥 가해"가 어떤 것인지 가능한한 분명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a) 우선 문제제기자의 말을 가볍게 여기거나, 문제제기가 말하는 방식이 “무섭다"라는 등의 말을 한 것이 비판됩니다. 말의 내용이 아니라 말투를 문제삼는 행위는 톤 폴리싱(tone policing 이 말을 해석을 하자면 말투에 대한 검열 같은 거죠)이라고 불리며 일종의 가해로 규정됩니다. 물론 톤폴리싱이라는 말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문제제기자의 톤 (강한 목소리)를 무섭다고 하는 톤폴리싱이 가해가 될수 있는 것처럼, 충분히 의견을 말하지 않거나 화를 내거나 싸우지 않는 (약한 목소리)를 급진적이지 않다거나 가해자에 대한 동조라고 판단하는 것 또한 톤폴리싱이 된다는 자가당착적인 면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4].


어떤 경우건 톤폴리싱은 성폭력/성희롱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이부분에 대한 논의는 그 그룹 내에서 (저는 그 그룹의 구성원이 아니므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충분히 이야기해서 실제로 문제를 규명하고, 그 문제 수준에 맞는 비판, 대응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단지 이 문제가 국한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운동내에서 벌어질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니까요.)


(b) 또 하나는 콜아웃된 문제를 콜인하는 방식으로 해결해보려 한 사람들의 시도가 노리밋을 진행하기 위한 알리바이 만들기, 혹은 콜아웃한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가해로 여겨집니다. (저와 D 씨의 노리밋 참여도 이런 차원에서 가해로 지목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콜아웃된 문제를 콜인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시도, 즉, 운동내부의 문제에 대응하는 태도의 차이를 가해로 규정할 수 있는가. 가해/피해를 규정하지 않고 문제를 바라본다면 아예 문제 해결이 불가능해지는 건가.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이 역시 성폭력/성희롱과는 대단히 다른 문제입니다. 


(c) 마지막으로는 1차 콜아웃 한 사람들이 채팅방을 나간 후의 연락이 가해로 지목되었습니다. 이것 또한 성폭력/성희롱의 맥락에서 있는 2차가해와는 다릅니다. 물론 사과도 변명도 필요없고 더 이상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연락을 거부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책위> 또한 해결을 바라고 있다면, 진상규명을 위해 어떤식의 대화체/기구가 꾸려져야 하는지 고민/상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회복 또는 변혁이 쉽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회복이라는 것을 화해라는 것으로 바꿔 생각해볼 때 그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바로 가능하지 않은 뿐더러, 어쩌면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바람직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결”을 목표로 한다면, 우리들이 현재 놓여있는 상황에서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생각할 때 제가 여기서 지적한  정의의 개념들이나 접근 방식들이 참조점이 될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 해결을 위한 움직임을 회복하기 위한 제안 


저와 D 씨가 서울 노리밋에서 <코엔지와 빈집> 행사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운동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어려움들을 좀더 큰 맥락에서 짚어보는 것이었습니다 [5]. 물론 행사는 여러가지 문제로 잘 진행되지 않았고, 이 행사를 정당화하는 것이 이 문서의 목적도 아닙니다. 글머리에 말했듯이 해결을 위한 움직임의 방향성을 모색하는 것이 제 글의 목적입니다.


비유로 말해보겠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우주공간과 같은 아무것도 닿는 것이 없는 곳에 놓인다면 우리는 가고 싶은 곳으로 향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그냥 "화해" "사이 좋게 지내자" 혹은 "매우 해결 잘 되었다"라는 식의 말은 그런 것입니다. 사물이 움직이려면 얼마간의 부하나 마찰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걷기 위해서도 자동차 바퀴가 돌아가기 위해서도 필요한 힘, 즉 마찰력(traction)이 필요한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그 동안의 과정에서 일어난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즉 해결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일정정도의 책임을 요구하고 또 책임을 지는 행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책임을 accountability라고 합니다. accountability는 responsibility와는 조금 결이 다른 설명이나 소통의 필요성을 강조한 책임의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한 책임 또는 책임감을 적절하게 행사하거나 요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accountability process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위한 책임, 또는 이동을 위한 마찰력이 지나치다면 물체/신체는 이동하는 대신 파괴될 것입니다. 책임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사회 운동에는 운동 주체가 적으로 간주하는 상대와 대결해서 상대를 부수겠다는 식의 논리가 언제나 있었습니다. 그야 말로 대결이죠. 운동 내에서 그런 충돌을 심하게 일어난 극단적인 예가 일본의 70년대, 80년대운동의 “우치게바(내부투쟁)”일텐데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격화되었었고 현재 일본의 사회 운동에도 부정적인 영향으로 남아 있지요.  


우리가 원하는 것이 상대를 부수기 위한 대결이 아니라 “해결"이라면 상대의 상태를 파괴할 만큼 과도하게 가해진 부하/마찰력이 무엇이었는가 살펴보고, 이에 대해 서로가 일정한 책임을 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현재의 어려움이 물리적/공학적으로 계산할수 있는 것이 아닌 정신적인 것이기때문에 적절한 마찰력을 계산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단지 물체가 아니라 아픔이나 서운함 분노 등등을 느끼는 마음을 가진 사람임으로, 이 마찰력은 각자의 “마음의 생태계” 안에서, 자신과 타인의 관계 속에서 고민되고 판단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고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문제는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최초의 문제제기자들에게나, <평창올림픽반대연대> 그리고 현 <대책위>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중요한 의도는 페미니스트적인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은, 아무리 봐도 페미니즘적 지평 위에서 적절한 마찰력으로 해결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지 않나요?


우선, 그동안 <대책위> 측은 사실을 확인하는 검증과정을 거치지 않고 지나치게 단정적인 언어를 사용해 왔습니다. <코엔지와 빈집> 행사를 진행한 저희들의 경위나 의도를 사실과 전혀 다르게 편집하고 곡해한 후, 그것을 기반으로 저희를 가해자라고 규정한 것, 그런 내용을 사실인 것처럼 공개한 것은 역시 문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페미니즘의 견지에서 책임 수행 과정(accountability process)이 진행 되는가요? 지금은 오히려 "해결"이 전혀 안 보이는 상황이 아닐까요? 저는 페미니즘의 견지에서의 해결도모를 막으려고 하는것, 즉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쉬를 시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현재의 상황에서 우리가 제대로된 마찰력을 가지고 페미니즘적 지평 위에서 "해결"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저도 D씨도 <평창올림픽반대연대> 혹은 현 <대책위>측의 말/행동에 당황하고, 고통받았습니다. 이를 두고 저나 D 씨가 어떤 처벌을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확인한적 없는 사실에 기반해 저희를 가해자화한 것은 그것이 어떤 의도/기반에서 벌어진 일이건 문제적인 행동임을 인정하고 그 행동이 유발한 고통에 대해 인식하고 사과해야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강조하지만 제가 바라는 것은 처벌로서의 사과가 아닌 인식로서의 사과입니다. 아주 기본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우리의 입장이 <대책위>와 입장은 다르더라도 그것이 누군가를 대상으로 공격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저나 D씨 또한 고통을 받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책위> 안에서도 여러 입장들이 있을 리 생각합니다. 불필요한 마음의 부담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능한 만큼의 노력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노력을 조건으로 저는 시간이 필요하다면 그 필요한 시간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한편, 저희의 행사 참여가 어떤 이유로든 누군가에게 심리적 고통이 되었다면 그에 대해 책임을 갖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만, 지금 <대책위>가 내민 일방적으로 상상된 서술을 바탕으로는 사과조차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제 행동이든 <대책위> 측의 행동이든 뭔가 잘/잘못이 있었다면 그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적절한 말과 개념/방식으로 검토가 가능한 자리를 만들었으면 합니다.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자면 그것은 인터넷 상에서 이루어지는 논쟁으로는 힘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너무나 당연한 말일지 모르지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일련의 일들에서 일어난 문제와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회복적 정의에 의거해 우리는 진실을 규명해야 하고, 그와 동시에 상처 입은 사람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과 다른 생각/행동을 하는 누군가를 공격하는 것은 진실을 규명하는 것도, 상처 입은 사람을 돌보거나 보호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상처와 상처 받았다는 원한이 타자을 향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과 타자에게 파괴적 영향을 미친다면 빠져 나와야만 합니다. 사람과 행동을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런 파괴적 연쇄를 막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해결”을 향하는 방향성 속에서 문제에 걸맞는 마찰의 수위를 고려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움직임, 즉 운동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끝으로. 운동은 진영과 적대의 방식만으로는도, 혹은 지금 이 글과 같은 논증만으로도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말이나 논리만으로 표현되거나 풀리지 않는 관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일련의 사건에서 누구도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언어를 갖지 못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역설적으로 말이 늘어났다고 생각합니다). 뭔가를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만으로 운동은 가능하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이 2년 사이 우정-관계의 힘에 대해 또 고독의 힘에 대해 비로소 좀 더 구체적으로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미흡한 글이지만, 이 고통스러운 소통 또한 해결을 향해,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움직임, 운동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의 일부가 되길 희망합니다.



[1]  회복적 정의에 대한 한국어 기사입니다: http://www.redian.org/archive/74037, http://www.redian.org/archive/74918

http://kopi.or.kr/?page_id=6

http://www.igood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32016

한국에서는 주로 학교 또는 기독교적인 맥락에서 소개되는 것 같습니다. 이는 회복적 정의의 개념을 정립한  하워드 제어(Howard Zehr)가 메노파(영어: Mennonites)(반율법주의적 공동체주의적 전통을 가진 기독교 일파)에서 나온 것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2] 변혁적 정의에 대해:

https://emu.edu/now/restorative-justice/2011/03/10/restorative-or-transformative-justice/

https://www.teenvogue.com/story/transformative-justice-explained

https://medium.com/@AndyEyeballs/why-its-painful-and-scary-to-talk-about-transformative-justice-and-why-it-s-time-6123b35d45fd

https://filtermag.org/how-can-we-reconcile-prison-abolition-with-metoo/

이들 개념은 북미 (특히 미국)의 형사사법 시스템(경찰, 법정, 교도소)이 수행하는 단속과 징벌이 압도적으로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를 향해 행사된다는 사실에 대한 문제의식 위에서, 운동 내의 문제를 자율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에서 사용됩니다:

https://crimethinc.com/2013/04/17/accounting-for-ourselves-breaking-the-impasse-around-assault-and-abuse-in-anarchist-scenes

https://libcom.org/library/confronting-vigilante-responses-accountability-work-need-or-accountability-everything-we

https://abolitionjournal.org/revolution-restorative-justice-anarchist-perspective/


[3] 

참고(영문): 

콜아웃의 필요성에 대해:

https://everydayfeminism.com/2014/09/called-out-acknowledging-oppression/

“콜아웃 문화” 비판: 

https://briarpatchmagazine.com/articles/view/a-note-on-call-out-culture

https://areomagazine.com/2019/02/04/whats-missing-from-call-out-culture-the-opportunity-to-change/

콜인에 대해:

http://www.bgdblog.org/2013/12/calling-less-disposable-way-holding-accountable/

http://rjcenterberkeley.org/restorative-conversations-calling-in/?fbclid=IwAR31Qd--uw_El1zN5c3UHloR9KeyoRRwWhrJb39kzu8Wu5u8h5Gx0p4AEIc

https://everydayfeminism.com/2016/05/call-out-accountability/



[4]  톤 폴리싱에 대한 기사들 (한국어):  https://ko.wikipedia.org/wiki/톤_폴리싱, http://m.ch.yes24.com/article/view/38781, (영어):https://everydayfeminism.com/2015/12/tone-policing-and-privilege/, https://medium.com/@chanda/what-s-the-harm-in-tone-policing-e933d90af247,

https://thefrisky.com/calling-out-tone-policing-has-become-tone-policing/ 


[5]아래 링크에서 제어 변혁적 정의가 답하려고 하는 물음들이 그 당시 행사를 준비하며 우리가 갖고 있던 관점들에 가깝습니다. 물론 이것이 유일한 접근방식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https://emu.edu/now/restorative-justice/2011/03/10/restorative-or-transformative-justice/). 

    • 어떤 사회적 상황이 해로운 행동이 나타나도록 만들었는지?

    • 이 사건 비슷한 사건들 사이에 어떤 구조적 유사점들이 있는지?

    • 어떻게 하면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할 수 있는지?